휴민트 리뷰 (홍콩 느와르, 첩보 액션, 류승완)
류승완 감독 신작이라는 말에 설레다가도 '이번엔 또 얼마나 뻔할까' 하는 마음이 동시에 드는 분, 저만 그런 게 아닐 겁니다. 솔직히 영화관 가기 전까지 고민을 꽤 오래 했습니다. 그래도 보고 싶은 마음이 결국 이겼고, 결론부터 말하면 영화를 다 보고 나서 한 가지는 분명하게 느꼈습니다. 이건 예상했던 것과 꽤 다른 영화라는 것을요.
류승완이라는 감독, 어디서 왔는가
류승완 감독을 처음 주목하게 된 건 2000년 데뷔작 때부터라는 분들이 많습니다. 저도 그쪽 세대와 비슷하게 영화를 접해왔는데, 비디오 대여점에서 테이프를 10개씩 빌려 쌓아 놓고 보던 그 감각이 류승완 초기 작품들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시절 영화 보기란 지금처럼 스트리밍 한 번에 해결되는 일이 아니었으니까요. 뭔가를 보기 위해 공을 들여야 했고, 그래서 오히려 더 특별했습니다.
이 감독의 필모그래피(filmography), 즉 한 감독이 만들어온 작품 전체 목록을 보면 흥미로운 흐름이 보입니다. 초기작들에서는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때로는 맞지 않는 것들을 무리하게 섞는 패기가 있었습니다. 쿠엔틴 타란티노 이후 세계적으로 유행한 비선형 서사(non-linear narrative), 다시 말해 시간 순서를 뒤섞어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을 가져다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소화하려 했고, 그 안에 여성 투톱 주인공이나 동아시아 액션 오마주를 욱여넣었습니다.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는 혹평도 있었지만, 저는 그 울퉁불퉁함 자체가 오히려 매력이었다고 봅니다.
그러다 베테랑이 천만 관객을 넘기면서 류승완은 완전히 다른 무게를 짊어지게 됩니다. 흥행 감독이 된다는 건, 제작비를 끌어올 수 있는 몇 안 되는 이름이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실패에 대한 부담이 개인의 영역을 한참 벗어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군함도 이후 좀 더 안전한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는 시각도 있는데, 저는 그게 단순히 상업적 타협이라기보다는 현실적인 선택에 가깝다고 봅니다. 한국 영화 산업이 자생할 수 있으려면 극장을 채우는 영화가 꾸준히 나와야 하니까요.
홍콩 느와르라는 뿌리, 그리고 첩혈쌍웅의 그림자
휴민트를 보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거 어디선가 본 감정인데' 였습니다. 조인성이 롱코트를 걸치고 등장하는 순간부터 뭔가 익숙한 질감이 느껴졌는데, 나중에야 정리가 됐습니다. 이 영화의 감정적 뿌리는 홍콩 느와르(Hong Kong noir), 즉 1980~90년대 홍콩에서 만들어진 총격 액션과 허무주의적 멜로드라마가 결합된 장르에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오우삼 감독의 첩혈쌍웅과의 유사성은 거의 노골적인 수준입니다.
두 남자 주인공이 적이었다가 한 여성을 구하는 과정에서 서로 총구를 겨누고 결국 손을 잡는다는 구조, 그 안을 채우는 허무주의적 정서와 뜨거운 감정. 이건 베낀 게 아니라 재해석입니다. 참고로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KMDb)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류승완은 데뷔 초부터 홍콩 액션 영화에 대한 오마주를 꾸준히 작품에 녹여온 감독입니다. 이번에는 그 뿌리를 더 정면으로 드러낸 것이고요.
다만 이 지점에서 호불호가 크게 갈릴 수 있습니다. 90년대 홍콩 느와르 정서에 익숙한 분들이라면 '아, 이 감각이구나' 하고 금방 받아들이겠지만, 그 정서를 경험하지 못한 분들에게는 감정이 다소 올드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여성 캐릭터가 구출을 기다리는 역할에 머문다는 점도 현대 관객 입장에서는 어색할 수 있고, 저도 그 부분은 아쉬웠습니다. 신세경 캐릭터에게 조금 더 주도적인 서사를 줬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영화 내내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드라마는 흔들리고, 액션은 압도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뭔가 모를 씁쓸함이 있었습니다. 초반 정보원이 죽는 장면에서부터 그 감각이 시작됐습니다. 국가가 먼저 정보를 빼내고, 정작 그 사람을 구하는 건 우선순위에서 밀린다는 이야기는 영화 속 설정이지만 현실에서도 충분히 일어날 법한 일입니다. 조직은 아래 사람들이 있어야 돌아가지만, 필요가 없어지면 잘라내는 구조. 그 냉혹함이 이 영화 전체에 깔려 있습니다.
이런 씁쓸한 현실감 위에 박정민의 로맨스가 갑자기 올라오는 순간, 솔직히 영화의 방향이 헷갈렸습니다. 첩보물을 보러 온 건데 멜로드라마가 시작된 거냐고 의아해하는 분들도 분명 있을 겁니다. 저는 그 의도는 이해했습니다. 차가운 세계 속에서도 사람 냄새 나는 감정이 남아 있다는 것, 박정민이 죽어가면서도 사랑을 붙들고 있다는 것. 그게 이 영화가 말하려는 핵심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 감정이 충분히 쌓이지 않은 채 클라이맥스로 향하다 보니 힘이 좀 빠지는 느낌이었습니다.
드라마 파트의 아쉬움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 박정민과 신세경의 사연이 충분히 설명되지 않아 감정 이입이 어렵습니다.
- 조인성 중심의 첩보 서사와 박정민 중심의 멜로 서사가 균형을 잡지 못하고 어중간하게 공존합니다.
- 신세경 캐릭터가 주도적인 역할 없이 구출 대상으로만 기능하여 현대 관객의 공감을 얻기 어렵습니다.
반면 액션 시퀀스(action sequence), 즉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된 액션 장면들의 완성도는 다른 차원이었습니다. 카체이싱에서 시작해 총격전으로 넘어가고, 총알이 다 떨어지면 맨몸 격투로 전환되는 설계가 치밀합니다. 중요한 건 이게 단순히 물량 공세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존 윅 시리즈처럼 액션이 과잉 공급되어 후반부에 감각이 마비되는 것과 달리, 이 영화는 각 단계마다 긴장감을 조이고 풀기를 반복하며 에스컬레이션(escalation), 즉 강도를 단계적으로 높여가는 구조를 정확하게 지킵니다. 액션 장면이 끝나가는 게 아쉬울 정도였습니다. 저도 영화 보면서 그런 감정이 드는 게 오랜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 극장 갈 가치가 있는가
보기 전에 기대치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이 영화의 평가는 완전히 달라질 것 같습니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같은 치밀한 정통 스파이 스릴러를 기대하시는 분들이라면 이 영화는 맞지 않습니다. 음모가 중첩되고 작전이 착착 맞물리는 구조를 원하신다면 중반부에서 지루함을 느낄 가능성이 높습니다.
반면 류승완 감독 이전 작품들을 그럭저럭 즐겁게 봤고, 특히 액션 장면에서 만족도가 높으셨던 분이라면 이 영화는 일종의 총망라(total collection)입니다. 카체이싱, 총격전, 맨몸 격투가 하나의 시퀀스 안에 압축된 방식은 할리우드 메이저 액션 영화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사운드가 좋은 상영관에서 보면 총알 한 발 한 발의 질감이 다릅니다. 이건 스트리밍으로는 절반도 전달이 안 되는 경험입니다.
실제로 한국 영화진흥위원회(KOFIC)의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KOBIS)을 보면 국내 극장용 대작 액션 영화의 개봉 편수가 점점 줄고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자리를 OTT가 메우고 있는 상황에서, 이 규모의 로케이션 촬영과 세트 액션을 극장용으로 만들어낸다는 것 자체가 지금 시점에서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결국 휴민트는 드라마와 액션 사이에서 완벽하게 균형을 잡지는 못한 영화입니다. 하지만 그 불균형 속에서도 류승완이 30년 동안 쌓아온 액션 설계 능력이 가장 밀도 높게 압축된 작품이라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박정민이 죽어가면서 마지막으로 건넨 말이 무엇이었는지, 그 여운이 영화 밖으로까지 이어지는 분이라면 아마 이 영화가 오래 남을 겁니다. 저처럼 시작 전에 한참 고민했던 분들께는 그래도 한 번쯤 극장에서 확인해 보시길 권합니다.
---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DF1_ezrig3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