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고 싶은 비밀 (원작비교, 학원로맨스, 청소년사랑)
책을 먼저 읽고 영화관를 보신적이 있으신가요? 저는 최근 딱 그 경험을 했습니다. 2023년도 개봉작인 일본 학원 로맨스 영화 '말하고 싶은 비밀'인데요. 원작 소설을 먼저 읽고 영화를 찾아보면서 두 매체 사이의 간극을 꽤 생생하게 느꼈고, 동시에 제 고등학교 시절 기억까지 불쑥 올라왔습니다.
책에서 영화로, 처음 봤을 때 든 솔직한 감상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원작 소설을 읽을 때는 인물들의 감정선이 천천히 쌓이면서 자연스럽게 이입이 됐는데, 영화에서는 몇몇 장면들이 툭툭 잘려나간 느낌이었습니다. 원작을 모르는 상태에서 봤다면 "갑자기 왜?"라는 물음표가 생겼을 법한 장면들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서사 압축(narrative compression)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이는 소설처럼 긴 분량의 이야기를 영화라는 제한된 러닝타임 안에 담기 위해 특정 장면이나 감정의 흐름을 의도적으로 축약하는 각색 기법을 뜻합니다. 제가 직접 겪어보니, 이 압축이 '말하고 싶은 비밀'에서는 꽤 크게 체감됐습니다. 세토야마가 축구부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던 사정, 노조미와 교환 일기가 시작되는 계기 같은 부분이 원작에서는 충분히 설명되는 반면 영화에서는 생략되거나 압축된 것이 그 예입니다.
그렇다고 영화가 별로였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영상 매체가 가진 시각적 연출 덕분에 오히려 책보다 더 설레는 장면도 있었습니다. 세토야마가 노조미를 바라보는 시선, 두 사람이 교환 일기를 주고받으며 조금씩 가까워지는 장면 같은 경우 글로 읽을 때보다 화면으로 볼 때 감정이 더 직관적으로 전달됐습니다.
원작비교로 보는 각색의 득과 실
원작 소설과 영화를 함께 경험하고 나서 정리해보면, 두 매체는 각각이 잘하는 것이 다릅니다. 각색(screen adaptation)이란 소설·만화·연극 등 다른 매체의 원작을 영화나 드라마용 시나리오로 다시 쓰는 작업을 말하는데,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무언가는 살리고 무언가는 포기하게 됩니다.
'말하고 싶은 비밀'에서 각색 과정에 가장 큰 변화가 생긴 부분은 인물의 내면 묘사였습니다. 세토야마가 사실 처음부터 노조미가 아닌 다른 사람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는 설정, 그리고 그 감정이 뒤바뀌는 과정은 소설에서 꽤 공을 들여 그려지는 부분인데, 영화에서는 상당히 빠르게 지나갑니다. 반면 요네가 세토야마와 노조미를 이어주려는 노력이나, 노조미가 질투를 느끼는 장면 같은 것들은 영상으로 보니 훨씬 코믹하고 귀엽게 느껴졌습니다.
이런 원작과 영화 사이의 차이에 대해 영화진흥위원회(KOFIC)는 원작 IP(지식재산권) 기반 영화의 각색 성공 요건으로 "원작 팬층의 기대와 신규 관객의 접근성을 동시에 충족하는 균형"을 꼽은 바 있습니다. 제 경험상 이 균형은 정말 어렵습니다. 원작을 읽은 저로서는 아쉬운 부분이 눈에 띄었지만, 원작을 모르는 친구에게 먼저 영화를 권했더니 "충분히 재밌었다"는 반응이었으니까요.
학원로맨스가 불러온 나의 고등학교 기억
영화를 보는 내내 저는 자꾸 딴 생각을 했습니다. 제 고등학교 시절 이야기입니다.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는데, 알고 보니 친한 친구도 같은 사람을 좋아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 뒤로 저는 혼자 조용히 마음을 품고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토야마가 자신의 마음을 숨기며 거짓 교환 일기를 써 내려가는 장면을 보면서, 그때 제 심정이 꽤 비슷했겠다 싶었습니다.
결국 저는 고백까진 아니지만, 어떤 계기로 마음을 살짝 내비친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냥 엔딩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졸업 후 다른 사람을 만났고,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 그때 그 사람은 대학 입시에 집중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는 그게 서운했는데, 지금은 그냥 웃음이 나는 추억입니다.
학원로맨스(学園ロマンス)라는 장르는 학교를 배경으로 10대 인물들의 사랑과 성장을 다루는 이야기를 뜻합니다. 이 장르가 어른이 된 관객에게도 꾸준히 사랑받는 이유는, 보는 사람마다 자기 학창 시절 기억을 하나씩 꺼내게 만들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실제로 청소년기의 사랑은 성인의 연애와는 다른 결을 가집니다. 심리학에서는 이 시기를 자아정체감(ego identity) 형성기라고 부르는데, 이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탐색하는 과정에서 관계와 감정에 훨씬 강렬하게 반응하게 되는 발달 단계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그때의 설렘도, 상처도, 어른이 되고 나서 돌아보면 유독 생생하게 남아있는 것입니다.
청소년기 감정 발달에 관한 연구들에 따르면(출처: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이 시기의 첫사랑과 또래 관계 경험은 이후 성인기의 애착 방식과 대인관계 패턴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영화 한 편을 보면서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책을 먼저 읽을까, 영화를 먼저 볼까
이 질문을 주변 사람들한테 꽤 많이 받았습니다. 제가 직접 겪어보니 두 가지 루트는 경험의 질 자체가 다릅니다. 어느 쪽이 낫다기보다는, 어떤 경험을 원하느냐에 따라 선택이 달라집니다.
두 루트를 직접 비교해보면 이렇습니다.
- 책 먼저 → 영화: 인물의 감정선과 배경을 충분히 이해한 상태에서 영화를 보게 되므로 장면 하나하나가 더 풍성하게 느껴집니다. 단, 생략된 부분이 눈에 밟히고 "왜 이 장면을 뺐지?"라는 아쉬움이 생길 수 있습니다.
- 영화 먼저 → 책: 영화로 이야기에 흥미를 붙인 뒤 책으로 넘어가면 "이 장면 뒤에 사실 이런 이유가 있었구나"라는 발견의 재미가 있습니다. 영화에서 의문으로 남았던 부분들이 소설을 통해 해소됩니다.
- 책만 읽기: 원작 소설의 감정 밀도를 온전히 즐길 수 있지만, 영상화된 두 배우의 연기나 음악, 색감 같은 요소는 경험할 수 없습니다.
- 영화만 보기: 가볍게 청춘 로맨스 한 편을 즐기기엔 충분합니다. 단, 일부 장면에서 맥락이 아쉽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영화 먼저, 책 나중'을 추천하는 쪽입니다. 영화를 보고 "좋았어" 혹은 "뭔가 아쉬웠어"라는 감정이 남았다면, 그 감정을 들고 책으로 들어가는 게 두 번 다 즐길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반대로 책을 먼저 읽고 영화를 보면 아쉬움이 앞서는 경우가 생깁니다. 제가 그랬으니까요.
미디어믹스(media mix)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하나의 원작 콘텐츠를 소설·만화·영화·드라마 등 여러 매체로 동시에 또는 순차적으로 전개하는 전략을 뜻하는데, 일본 콘텐츠 산업에서 특히 활발하게 활용되는 방식입니다. '말하고 싶은 비밀'도 이 미디어믹스의 흐름 안에 있는 작품이고, 그렇기 때문에 어떤 매체를 먼저 접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입구에서 같은 이야기를 만나게 됩니다.
오랜만에 일본 학원 로맨스 특유의 손발이 오그라드는 그 맛을 제대로 즐겼습니다. 영화가 그저 그랬다면, 혹은 뭔가 아쉬움이 남았다면 시간을 내서 원작 소설을 꼭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영화에서 미처 담지 못한 인물들의 감정과 반전의 반전이 소설 안에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더워지고 있는 지금 밖으로 나가는게 아닌 선풍기나 에어컨 틀어놓고 책 한 권 들고 이불 속에 파고드는 것도 꽤 좋은 선택이 될 것 같습니다.
---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rL_AxMHMPcM